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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강(구)전투 - 일본은 한반도를 구해라? 드라마로 추천

by 심미안수 2024. 1. 30.

영화 <노량>의 배경이 되는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한중일 삼국의 국제전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동아시아 삼국의 최초의 국제전은 이미 오래전 삼국시대에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백강(구)전투 입니다

 

이 전투는 백제 멸망 후 있었던 백제부흥운동으로 당시 신라와 당나라 vs백제부흥군과 왜의 국제전이였습니다

 

일본이라면 임진왜란 왜구 일제강점기등 한반도 침략의 역사만 있었던 것이 아니였네요

 

이 전투의 진행과정은 나무위키가 잘 나와있습니다

 

 

 

백강 전투 - 나무위키

신라는 중심부가 공격당했음에도 오히려 반격의 기회로 삼아 주류성 공격을 준비하자, 당고종도 이에 호응하여 추가 병력 파견을 준비한다. 663년 5월, 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위위장군(右威衛

namu.wiki

 

결과는 백제부흥군과 왜군의 참패로 끝났고 백제는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물론 후삼국시대의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기는 합니다만)

 

백강전투의 결말이 백제의 멸망이라는 점과 최초의 동아시아 삼국의 국제전이라는 역사적 사실도 중요한  전투이지만 이런 역사적 결말 결과도 중요하지만 원인 즉 동기도 중요합니다

 

당시에 백제부흥운동에 동원되어 백강전투에 참여한 왜군의 숫자가 27000명(설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과 왜선 1000척 정도라고 하는데요 당시에는 매우 많은 숫자라고 합니다

 

왜군파병을 결정한 이는 사이메이여왕이라고 하는데요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한 왜군파병을 진두지휘하기 위해 사이메이여왕은

 

당시 야마토국의 수도였던 나라현에서 한반도에 가까운 후쿠오카의 임시행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황태자?와 문무백관까지 모두 데리고 갔다고 하니 거의 천도 수준이었다고 하네요

 

지원군의 규모와 천도수준의 이동만 봐도 당시 사이메이여왕과 왜국은 백제부흥운동에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한 국가에 다른 나라의 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총력전을 벌였다는 것은 심상치않은 평범치 않은 이유 즉 동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겠죠

 

바로 이 동기 이유가 역사적으로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kbs역사스페셜에서 관련내용을 방송한 적이 있네요

 

방송에 보면 백제부흥운동에 왜가 거의 총력전수준의 국력을 기울였던 이유에 대해 일본내에서는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

,당이 한반도에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니 일본의 한반도 영향력을 지키기 위한 동기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고 합니다

 

당연하고 예상된 주장이네요 ㅋ

 

소위 임나일본부설에 기반한 주장이겠죠

 

 

 

임진왜란을 보면 당시 명에 사대하던 조선이 왜의 침략을 받자 명에서는 구원병을 파병하게 됩니다

 

얼핏 이렇게 보면 일본내에서의 한반도 영향력유지목적의 파병주장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당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의 명분으로 명을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였습니다

 

당연 조선이 들어줄 수 없는 요구이니 그냥 핑계일 뿐이죠

 

실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이어서 명나라 나아가 인도까지 침략할 계획까지 있었다고 하죠

 

명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내에서 왜군을 막지 않으면 전쟁터가 명나라가 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국익의 관점에서도 조선파병은 당연한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왜는 당과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자 다음으로 왜를 공격할 것을 유려해서 규슈등에 성을 쌓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명과 마찬가지로 당나라세력을 한반도에서 막고자하는 의도라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차이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왕조국가에서 이런 전쟁을 수행하는 결정은 역시 일왕(천황)의 의지가 가장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겠죠

 

파병을 결정한 사이메이여왕은  천도까지 하면서 총력전을 펼쳤고 성공을 비는 의식까지 했는데 이는 명나라 황제와는 다른 행위이죠

 

일본서기에는 백제부흥군을 도운 이유가 나와있다고 하는데요

 

사이메이여왕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일본서기》는 백강구 전투 파병의 동기를 '복신의 뜻에 따라'라고 적고 있는데, 귀실복신은 백제 부흥군의 총대장이었다. 또 《구당서》에는
'부여풍지중'...'당시 일본군은 부여풍의 무리다'

 

나무위키에 나온 내용이고요 kbs역사스페셜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귀걸복신 즉 백제부흥군의 총대장의  뜻에 따라? 일본군은 부여풍의 무리다?

 

일본서기와 구당서의 기록에 나온 표현이 심상치는 않아 보입니다

 

말이라는 것이 아가 다르고 어가 다르다고 하죠

 

누구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그 누구가 아랫사람보다는 윗사람의 느낌이 강하고요 가령 명황제가 조선총사령관의 뜻에 따라 파병을 했다는 표현을 쓰진 않겠죠 부여풍은 당시 야마토에 머물다가 백제부흥운동의 왕이 되기 위해 백제로 돌아온 백제의 왕자인데 일본군이 부여풍의 무리다? 부여풍을 돕기 위한 지원군이라는 느낌보다는 무리라는 것은 수하 부하라는 의미가 강하게 느껴지거든요

 

아무튼 미묘한 표현문제는 해석의 뉘앙스이고 해석의 영역이라고 치고

 

kbs역사스페셜에서는 일왕가의 뿌리를 살펴보고 있는데요

 

kbs역사스페셜

 

 

방송에서는  일왕가(천황가)가 세 번의 교체기가 있다고 하는데요 케이타이일왕이 백제계 왕이고 지금의 일왕가는 케이타이일왕의 직계손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케이타이왕(계체왕)과 백제 무령왕의 관계에 대해 인물화상경이라는 유물로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밀접한 또는 친형제로 해석하기도 한다고 하는데요

 

kbs역사스페셜에서는 친형제라고 보는 주장에 힘을 싣고 있고요 나무위키에서는 여러 근거를 제시하며 이런 주장이 있다정도의 수준에서 소개하고 있네요

 

아래 나무위키 게이타이 덴노 (계체왕)의 <3.5.스다하치만 신사 인물화상경과 백제 무령왕과의 관계>를 보면 나와있습니다 

 

 

게이타이 덴노 - 나무위키

《고사기》나 《일본서기》는 그를 제15대 오진 덴노의 5세손(증손자의 손자/현손자)이요, 아버지는 히코우시 왕(彦主人王)이라고 적었다. 오미국(近江國) 다카시마노사토(高嶋鄕) 미오노(三尾

namu.wiki

 

게이타이 일왕이 백제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일왕계가 백제계라고 하기에는 부족해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위의 일왕가계보에 나온 게이타이일왕의 후손인 비따쯔일왕을 나무위키와 kbs역사스페셜에서 보면요

 

신찬성씨록 - 비다쓰일왕의 손자가 백제왕이다,  비다쓰 덴노가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야마토 (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

 

일본서기 - 비다쓰 천황은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백제대정궁'을 지었다(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

 

 

 

비다쓰일왕은 백제대정궁이라는 궁을 야마토도읍에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와 왜의 관계가 조선과 명의 관계와 비슷했다면 명나라가 도읍에 조선궁을 지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죠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비다쓰일왕의 손자가 백제왕이다에서 손자는 위의 일왕계보에도 나온 조메이일왕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데요

 

손자 즉 조메이일왕이 백제왕이다는 말이 애매하긴 한데 

 

《신찬성씨록》이라는 고대 기록에 "비다츠의 손자 '백제왕'"이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조메이 덴노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7세기 중엽 조메이 덴노는 스스로를 백제인으로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 나무위키에서

 

비다츠의 손자 백제왕인 조메이일왕은 스스로를 백제인이라고 칭했다 ?

 

그는 비다츠일왕처럼 백제궁을 지었고 백제대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조메이 천황은 비다츠 천황의 친손자로 백제강(百濟川) 강변에다 '백제궁'과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9중탑(九重塔)도 세웠다”- 일본서기

 

조메이 일왕의 행보는 비다츠일왕보다 더 심상치 않습니다

 

백제강의 강변에 백제궁과 백제대사(절)를 지었고 9중탑을 세웠다 

 

백제대사는 당시 최대규모의 사찰로 유적지에서 백제양식과 백제식 기와가 쏟아져 나왔다고 합니다 

 

“641년 10월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시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百濟の 大殯)이라고 부른다.”(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內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 일본서기

 

이런 일왕들의 행동에 대해 당시 백제가 선진국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백제라고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

 

이쯤되면 일왕가는 대대로 백제계이거나 아직 백제덕후라고 봐야겠죠

 

하지만 백제덕후라는 해석은 상식적이진 않죠

 

어느 나라의 국왕이 스스로를 백제인이라고 하고 백제궁을 짓고 거기서 죽고 백제의 대빈을 만들고 백제대사를 최대규모로 만들겠습니까

 

그 나라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사건이 대를 이어서 내려왔다는 것이 되는데 덕후만으로 해석하는 것이 비상식적입니다

 

더군다나 임나일본부설에 입각하면 자신들의 식민지였던 나라를 사모하여 일왕이 자칭 백제인이라고 칭하고 궁을 짓고 절을 지어?

 

 

조메이일왕의 부인이 사이메이여왕인데요 그녀가 백제부흥군에 지원병파병에 총력을 기울였던 일왕입니다 

 

사이메이일왕은 백제부흥군지원을 선두지휘하다가 사망하게 되었고 그녀의 아들인 텐지일왕이 즉위까지 미뤄가면서 지원군파병준비를 하였고 결국 백강전투에 파병하게 되었던 것이죠

 

덴지일왕이 군사를 모집했던 지역이 도래인 즉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모여살던 지역이라 결국 왜군은 백제계 도래인들이었을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구당서의 '당시 왜군은 부여풍의 무리다'는 표현이 맞는 것이 되겠죠 그 왜군은 결국 백제계 도래인들이었으니깐요

 

 

 

요새 <고려거란전쟁>이 상당한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는데 <백강전투>도 드라마로 한번 추천해보고 싶네요

 

특히 넷플릭스같은 OTT로 일본을 포함한 전 세계에 방송된다면 더 재미있을 것 같네요

 

사실 드라마보다 일본과 한국내의 친일 토착왜구들의 반응이 더 기대됩니다 ㅋ

 

그들에게 일왕가는 성역화된 지존의 위치거든요

 

그리고보니 북한에도 절대지존이 있고 남한에도 요새 성역화가 있다는 말도 있기 하더군요 

 

한중일 삼국의 최초의 국제전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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