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귀주대첩 - 동아시아를 움직인 한국사 3대 대첩

by 심미안수 2023. 6. 23.

한국사에서 3대 대첩이라면 살수대첩, 한산도 대첩, 귀주대첩을 말합니다

 

한산도 대첩은 광화문에 서 계신 성웅 이순신 장군의 유명세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속에서 나오기도 하였죠

살수대첩도 중국 통일왕조인 수나라와의 대결에서 고구려가 승리한 전쟁으로 비교적 알려져 있습니다 수나라패망의 원인중에 하나가 고구려원정의 패배라고 합니다

 

하지만 귀주대첩은 다른 2개의 대첩에 비하면 가장 적게 알려진 승리의 역사입니다

 

 

 

귀주대첩은 고려와 거란의 3차에 걸친 전쟁을 종식시킨 전투로 거란의 소배압의 10만 대군을 귀주에서 몰살시킨 전투입니다

대첩은 단지 큰 승리를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닙니다

 

그 전투의 결과가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귀주대첩의 결과는 고려의 국운을 지킨 결과만을 남긴 것이 아니고 동아시아의 거란, 송나라, 고려의 3각세력의 힘의 질서를 이루게 되었다는 평가입니다

 

당시 거란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한족의 송나라와 '전연의 맹약'이라는 조약을 맺어 매년 비단20만필과 은10만냥을 받는 댓가로 침략하지 않기로 합니다

 

실질적으로 당시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였습니다 '전연의 맹약'이후에도 거란은 송나라를 칩입하여 세폐를 더 받아내기도 하죠

이런 거란이 고려와의 전쟁에서 귀주에서의 10만 대군의 몰살은 동아시아 3국의 힘의 균형을 맞추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거란의 국력은 정체혹은 쇠퇴를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들의 세력권에 있던 여진족(금나라)에 의해 거란(요나라)은 망하게 됩니다

 

귀주대첩 후에 고려는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서 발언권이 세어지게 되고 이웃의 작은 나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송나라에서는 조그만한 나라 고려사신의 무례함(?)과 과도한 요구 그리고 송나라 조정의 저자세에 소동파를 비롯한 혐한론자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3차례의 전쟁은 살수대첩과 병자호란을 연상시킵니다

 

거란의 2차 칩입때 고려의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고려왕 현종은 전주 광주 나주 공주등을 전전하는 피난길에 오르게 됩니다

 

결국 친조(고려왕이 직접 거란왕을 찾아감)하는 조건으로 화친을 맺게 되는데 거란의 성종이 철수한 후 친조의 약속은 지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거란과 송나라 그리고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국운이 경각에 달리고 수도가 함락되고 왕이 굴욕을 겪게 되는 것이 병자호란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그 결과는 병자호란과 완전히 달랐는데 바로 귀주대첩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살수대첩과 비슷한 부분은 일부에서 귀주대첩으로 인해 거란이 망했다는 평가도 있고 수공으로 적을 격퇴했다는 공통된 부분도 있지만 이런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일단 귀주대첩 후 거란이 망한 것은 100여년 후입니다 물론 귀주대첩 후 거란의 국력이 더 이상 뻗어나가지 못하고 정체 쇠퇴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수공은 귀주대첩이 아니 삼교천 전투였고 귀주대첩은 20만 고려군과 10만 정예기병 거란군의 맞짱이였습니다

 

배수진을 친 거란군이 하천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다는 기록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합니다

 

살수대첩과 공통점은 대승을 거둬 동아시아 세력판도를 바꾼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귀주대첩에는 총사령관은 강감찬 장군 부사령관이 강민첩 장군 그리고 정예군 1만으로 거란군의 후방을 쳐서 승기를 잡게 한 이종현 장군등이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동아시아의 세력판도에 영향을 끼친 승리도 남한산성의 굴욕만큼이나 알아둬야 할 역사이자 교훈입니다

 

남한산성은 소설로도 영화로도 만들어져 종종 인용되곤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나라든 굴욕만 혹은 영광스런 역사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높게 치며 사대가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 중국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의 역사도 근대역사의 굴욕뿐만 아니라 전연의 맹약, 정강의 변, 토목의 변등 굴욕의 역사도 있습니다 한족의 통일 왕조는 수천년간 한나라와 명나라 뿐이였고 (수당은 논란은 있지만 논란자체가 굴욕이죠) 송나라는 국력이 약해 여러 나라에게 굴욕을 당한 나라였습니다

 

지나친 국뽕도 문제지만 지나친 사대성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지만 형식적이지만 거란과 사대외교를 맺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현실적인 실리외교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이런 사대외교라는 것은 당시의 오랜 외교질서였고요 고려는 내부적으로 황제를 칭하기도 하였고요 송나라는 고려와 함께 거란을 공격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거란과 전쟁을 하는 것은 고려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죠 

댓글